1. 편의점은 왜 불편할까?
고객들이 편리하게 이용하라고 만들어진 편의점이 왜 불편할까?
소설 불편한 편의점의 제목을 보고 먼저 떠오른 생각입니다.
불편한 편의점은 서울역에서 노숙생활을 하던 독고 씨가 어느 날 70대 염 여사의 지갑을 주어 돌려준 인연으로 여사가 운영하는 편의점에서 야간 알바를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시작이 됩니다.
하지만 말도 어눌하고 행동도 느린 독고 씨가 손님을 제대로 상대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게 웬걸 의외로 독고씨는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일을 익히고 손님은 물론 동네 주민들과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묘하게 사로잡으면서 편의점의 밤을 든든하게 지켜갑니다.
불편한 편의점에는 독특한 개성과 사연을 지닌 인물들이 차례로 등장을 해서 독고씨와 티격태격하며 별난 관계를 형성해 갑니다.
이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오해와 대립, 충돌과 반전은 예상치 못한 폭설을 자아내기도 하고 때때로 눈시울을 붉어지게 하기도 합니다.
골목길 한켠에 불편하기 짝이 없는 작은 편의점이지만 고단한 삶을 위로하고 웃음을 나누는 특별한 공간이 되어가는 서울의 오래된 동네 청파동의 불편한 편의점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2. 불편한 편의점 이야기
염영숙 여사가 가방 안에 파우치가 없다는 걸 알았을 때 기차는 평택 부근을 지나고 있었다.
지갑, 통장, 수첩 등 자신의 가장 중요한 것들이 담긴 파우치가 없다는 것에 그녀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염 여사는 자신이 타고 있는 기차의 속력에 뒤지지 않게 두뇌를 가동해야 했다.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되돌리기라도 하듯 기억을 리와인드했다.
혼잣말에다 다리를 떨며 골몰해 있는 그녀의 행동에 옆자리 중년 사내가 헛기침을 했다.
그녀의 몰입을 방해한 건 옆자리 사내의 헛기침이 아니라 가방 안에서 울린 휴대폰 착신 음악이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한 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상대방은 대답이 없었다.
다만 주변의 소음이 공공장소임을 짐작케 했다. "누구세요?"
전화기 너머로 들린 음성은 사람의 목소리라고 하기엔 너무나 거칠고 불분명했다.
마치 겨울잠을 끝낸 곰이 동굴에서 나와 처음 입을 열면 나올 법한 소리였다.
"네, 그런데요. 지갑요? 맞아요. 주우신 분인가요? 어디시죠?"
"서울..."
"서울 어디요? 혹시 서울역 아닌가요? 그렇죠. 서울역."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휴대폰 옆으로 내쉰 뒤 목청을 가다듬었다.
"아, 지갑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기차 아니고요.
다음 역에 내려서 바로 돌아갈 테니까 좀 보관해 주시거나 어디 맡겨주실 수 있나요?
사례는 제가 가는 대로 해드릴게요." "여기 있죠." "아 그래요?"
"알겠어요. 서울역 어디에서 만날까요?" "공항 철도 가는 길..." "GS 편의점이요? 아, 고맙습니다."
"빨리 갈게요." "천천히 와요." "알겠어요. 고맙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자 기분이 묘했다.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동물의 음성 같은 어눌한 말투는 그가 노숙자임을 확신케 했다.
무엇보다 "갈 데도 없죠."라는 말 뜻으로 보나 공중전화가 분명한 02 번호로 보나 그는 휴대폰 없는 노숙자가 분명했다.
염 여사는 잠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갑을 돌려준다는데도 뭔가 불안하고 다른 걸 요구할까 두려움이 번졌다.
하지만 전화까지 해 지갑을 순순히 돌려준다고 호의를 베푸는 사내가 굳이 해코지를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돌아가는 기차가 수원을 지날 때쯤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액정을 확인하니 아까와 같은 번호였다. 염 여사는 불안한 기분을 애써 억누르며 전화를 받았다.
"저요." 사내의 웅크린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염 여사는 변명하는 학생을 상대할 때처럼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말씀하세요." "저, 선생님 배가 고파서요." "그래서요?" "편의점 도시락 안돼요?".
순간 염 여사의 마음에 미열이 잃었다. 선생님이라는 호칭과 도시락이라는 단어가 그녀를 한결 너그럽게 만들어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러세요. 도시락 사 드시고 목마를 테니 음료수도 같이 사드시고 계세요."
"고마워요."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폰에 결제 문자가 떴다.
이건 마치 편의점 계산대 앞에서 전화한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재빠른 시간이었다.
많이도 배고픈 걸 보니 그의 정체는 서울역의 맹주, 비둘기의 친구 노숙자가 확실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GS 박찬호 투머치 참 많은 도시락 4,900원이라 떠 있었다.
'음료수는 안 사 먹은 거 보니 염치는 있나 보군.'
서울역에 도착하고 바로 공항철도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발견했다.
에스컬레이터로 내려가자 전방 오른편에 GS 편의점이 있었고, 곰의 목소리를 지닌 사내가 도시락에 얼굴을 묻은 채 그 앞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세명의 낯선 사내가 도시락을 먹고 있는 그를 향해 달려들었고, 염 여사는 놀라서 다가가던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세 명이 하이에나 같은 사내들 역시 노숙자임이 분명했는데, 그들은 도시락 사내를 누르고 뭉갠 채 무언가를 뺏기 위해 안간힘을 써댔다.
사내는 먹던 도시락을 떨군 채 온몸을 공처럼 웅크리고 방어했다.
하지만 결국 놈들에 의해 목이 졸리고 팔이 들리며 지키고 있던 물건을 빼앗기고 말았다.
안절부절못하며 살피던 염 여사의 시야에 놈들이 빼앗은 물건이 확 들어왔다.
자신의 분홍색 파우치였다. 도시락 사내를 떼어내듯 발로 몇 번 밟은 뒤 노숙자 셋이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염여사는 손발이 떨려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주저앉았다.
그때 사내가 반격하듯 일어나 파우치를 들고 있는 놈을 향해 온몸을 던졌다.
괴성과 함께 사내가 놈의 다리를 붙잡고 넘어뜨렸다.
놈을 짓누르며 다시 파우치를 빼앗은 사내를 곧 다른 녀석들이 덮쳤다.
순간 염 여사의 눈에 불이 들어왔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그들을 향해 뛰어나가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야! 이놈들아 그거 놓지 못해?!" 염여사의 앙칼진 외침에 사람들이 멈춰서 관심을 주기 시작하자 녀석들이 하나둘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오직 도시락 사내만이 품 안에 파우치를 끌어안은 채 웅크리고 있었다.
그녀는 사내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사내가 고개를 들어 염여사를 올려다보았다.
맞아서 부은 눈두덩이, 코피와 콧물이 섞여 나오는 코, 수염으로 가려진 입이 마치 사냥을 나갔다가 다쳐 돌아온 원시인처럼 보였다.
"진짜 괜찮아요."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곤 염여사를 살폈다. "고마워요. 그거 챙겨줘서."
사내가 자신의 왼팔로 감싼 파우치를 오른손으로 짚더니 그녀에게 건넸다.
그런데 염 여사가 파우치를 받으려는 순간 사내가 다시 그것을 자기 품으로 회수했다.
놀란 그녀를 꼼꼼하게 살피며 그가 파우치를 열었다.
"뭐 하는 거예요?" "주인 맞아요?" "그럼요. 내가 주인이니까 알고 온 거잖아요."
"아까 나랑 통화한 거 기억 안 나요?" 터무니없는 그의 의심에 염 여사는 기분이 나빠지려 했다.
사내는 가타부타 말없이 파우치를 뒤져 지갑을 찾았고, 거기서 신분증을 꺼내 살폈다.
"주민번호요." "아니 내가 지금 거짓말하는 것 같아요?"
"확실해야 해요." "이거 주인 돌려줄 책임이 있어요."
"거기 주민등록증에 내 사진 붙어 있잖아요. 비교해 봐요."
사내는 맞아서 부은 눈을 꿈뻑이며 주민등록증과 염여사를 번갈아 살폈다.
"사진 안 같아 보여요." 황당함에 염 여사는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찼다.
화도 나지 않았다. "오래됐어요. 사진."
오래된 사진이지만 분명 염 여사의 얼굴이고 알아볼 만도 한데, 아마도 건강 상태를 반영하듯 사내의 시력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혹은 그녀가 정말 몰라보게 늙었거나 "주민번호 말해봐요."
염 여사는 짧은 한숨을 쉰 뒤 사내를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
"... 5 20725. 됐어요?" "맞다. 확실해요." "그렇죠."
사내가 동의를 구하는 눈짓과 함께 주민등록증을 지갑에 넣고 다시 파우치에 담아 건넸다.
염 여사는 파우치를 받았다. 한바탕 소동이 정리되는 기분이 들자 사내에게 고마움이 물결치기 시작했다.
다른 노숙자들에게 맞아가면서까지 파우치를 지킨 것부터 주인에게 잘 돌려주기 위해 꼼꼼하게 확인을 한 것까지 사실 어지간한 책임감, 아니면 할 수 없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때 사내가 끙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염 여사도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지갑에서 현금 4만 원을 꺼냈다.
"여기요." 건넨 돈을 보고 사내가 망설이는 게 느껴졌다.
"받아요."
사내는 현찰로 손을 뻗는 대신 점퍼로 손을 넣어 정체를 알 수 없는 휴지 뭉치를 꺼냈다.
그걸로 코피가 흐르는 코를 훔쳤다. 그러고는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사내를 뒤따라갔다. 편의점 앞. 아까 먹던 도시락이 뒤집어진 광경을 보며 사내는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뒤이어 탄식하는 소리도 들렸다. 한동안 그의 뒷모습을 살피던 염 여사가 몸을 숙여 등을 두드렸다.
사내가 돌아보자. 그녀는 주눅 든 학생을 다독일 때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저씨 나랑 잠깐 어디 가요."
3.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위하여
그렇게 독고씨는 염 여사가 운영하는 편의점에서 일하게 되고 여러 인물들과 티격태격하며 관계를 이루어갑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을 무엇이었을까요?
이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일.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면 오늘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조금 더 친절하게 대하고
조금 더 관심을 갖고 그 사정을 돌아보고 내가 할 수 있는 뭔가를 해주는 일 베푸는 일. 그런 게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사실 이 작품 속에 나오는 독고씨는 말이 유창한 것도 아니고 잘 짜인 이론적 배경을 갖고서 뭔가 충고를 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건, 진심을 다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해주려는 독고씨의 태도와 마음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그 진심에서 저마다 자기가 필요한 것을 발견했고 얻었습니다.
점점 자기밖에 모르는 삭막해진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독고씨가 보여주었던 작은 진심, 그 정도이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